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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5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직후 김무정은 인민군 제2군단을 이끌고 북한으로 귀환했다. 그나마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어 군단의 핵심 역량을 잃지 않았다. 문제는 보안 유지를 위해 평양과 모든 무선을 끊어버린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행동이었지만 김일성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평양으로 돌아간 그에게 김일성은 평양방위사령관을 맡겼다. 유엔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앞두고 생색은 나지 않고 궂은 일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 방어를 맡긴 것이다. 더욱이 그의 주력 부대는 김일성이 데려가 버리고 수도 방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그에게 남겨진 것은 2만명도 되지 않은, 훈련조차 받지 못한 예비사단 병력이었다. 

그는 당시 평양을 지키는 것은 전군이 전멸하거나 적에게 포로로 잡힐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김일성이 정부 기관을 이끌고 북으로 철수한 다음 그는 10월12일 비교적 가벼운 저항 만을 하고는 압록강 쪽으로 병력을 철수시켰다. 김일성의 평양 절대 사수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그는 독자적인 판단으로 철수를 해버린 것이다. 

훗날 드러난 결과를 보면 그의 선택은 정확했다. 유엔군은 평양을 그해 10월 19일 점령했다. 당시 미군 제 187 공수연대는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평양 북쪽의 65 킬로미터에 있는 숙천과 순천 일대에 투입했다. 이것은 인민군 퇴로를 차단하고 북한 요인들을 사로잡고 수백 명 미군 포로를 구출할 목적으로 벌인 한국전쟁 최초 공수작전이었다. 인민군이 철수를 서둘렀기 때문에 평양방위사령부는 전방 방어를 책임진 1개 여단만 잃었을 뿐이었다. 자칫 그가 끝까지 평양을 사수한다고 했더라면 상당한 병력 손실이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쉽게 내준 것은 김무성 개인의 명성에는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과거 그가 김일성에게 대들었던 불경죄에다 그동안 부하를 임명할 때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그가 임의로 선임했다거나, 낙동강 전선에서 퇴각할 때 전선을 무단 이탈한 인민군 병사들을 즉결처분했던 점도 범죄 행위로 불거졌다. 




평양을 서둘러 포기하고 철수한 탓에 그는 민족보위성 부상겸 인민군 포병총사령관 직을 해임당하고 예비군단인 제7군단 군단장으로 발령받았다. 분명한 문책성 좌천 발령이었다. 당시 인민군 제7군단은 만포에 있었다. 그의 정치적 운명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군단장으로 있으면서 군의관을 사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가 어느날 전쟁에서 부상 당한 군관(장교)을 데리고 야전병원을 찾았다. 부상 당한 군관은 과거 팔로군 시절 그가 데리고 있던 부하였다. 그는 정신없이 부상군인들을 치료하고 있던 군의관(평북도 인민위원회 위생부장 이청산)에게 서둘러 부상당한 환자를 치료해줄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군의관은 퉁명스럽게 부상 군인들이 많은 데 어떡합니까. 기다려야 합니다. 순서대로 치료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군의관 태도가 무례하다고 판단한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그 자리에서 권총을 꺼내 쏴 죽여버렸다. 이런 행위는 엄중한  범죄행위였다. 그는 이 사고로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군단장에서 해임당했다.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으로 다시 역전의 실마리를 잡은 북한은 1950년 12월21일부터 23일까지 당시 임시 수도였던 강계에서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특별전원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장군들의 지휘가 무능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당정군 간부들이 조직행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질책했다. 



김일성은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한 만큼 다시 남한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남로당의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고 남로당 출신인 박헌영 측근 이승엽을 공적이 혁혁한 조직자라고 칭찬했다. 이승엽은 인민군의 서울 점령 당시 서울시당 위원장을 지냈고, 노동당 정치국원, 검열위원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 제2군단 군사위원(중국의 정치위원)을 맡기도 했다. 박헌영은 김일성 측근인 김일을 대신해서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맡았다. 



반면 갑산파(만주 빨치산) 연안파(중국 공산당 출신), 소련파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싸잡아 비판했다. 김일성의 비판을 받은 사람은 갑산파인 김일, 최광, 임춘추, 소련파인 김열, 연안파인 김무정, 김한중, 국내파인 허성택, 박광희였다. 특히 김일성은 김무정이 이른바 군벌주의를 범했다고 질책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초기 실수에 대해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일성은 미리 준비한 김무정의 죄상을 일일이 열거했다. 명령불복종, 전투조직 불성실, 퇴각도중 사병을 마구 죽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그는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출당 처분을 받았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중국 장정 시절 그를 괴롭혔던 위궤양이 재발했다. 마침 홍군 시절 상급자로 그가 모몄던 펑더화이(팽덕회)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참전한 터였다. 사정을 들은 펑더화이 사령관은 그를 중국 동북지방에서 가장 좋은 병원으로 후송했다. 그 곳은 루마니아 의사가 당시 지린성 창춘에서 운영하고 있던 병원이었다. 하지만 그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조국에 묻히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김일성의 동의를 얻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51년 8월 북한의 평범한 인민군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47세의 나이였다. 생전 그를 경쟁자로 여겼던 김일성은 그의 장례식은 아주 융숭하게 치렀다.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그는 평생 3번 결혼했다. 첫 결혼은 1920년 서울 경신중학교 재학 중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에서 했다.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중국으로 가면서 이 여성과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그는 1938년 팔로군 포병사령관 당시 산하포대 정치위원 텅치(騰綺, ~1982)와 결혼했다. 텅치는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참모장, 중국 초대 철도부장(장관)을 지낸 텅다이위안(騰代遠, 1904~1974)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텅치와의 사이에 1943년과 44년 연년생으로 딸과 아들을 낳았다. 딸의 이름은 옌리(延麗), 옌안의 고려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들은 이름이 옌전(延振), 옌안이 진동한다는 뜻이다. 남매 이름은 당시 옌안에 있던 최용건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귀국하면서 중국인 여성 텅치와는 이혼했다. 어머니 성을 딴 텅옌리는 어머니가 서기로 있던 헤이룽장성 무단장에서 중고교를 마친 뒤 베이징외국어대학에 진학해 스페인어를 전공했다. 중국 국영 무역업체에 근무했다. 남동생 텅옌전은 197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무정은 귀국한 이후 김영숙과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성격이 불같아 두려움이 없었다. 과단성있고 정력이 넘치고 재능이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특히 포병에 정통했다. 그가 중국에서 보여준 경력만 보면 충분히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8살 아래인 김일성과 달리 정치적 수완이 모자랐다. 평생 전쟁터를 누볐던 장군에게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판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는 유성처럼 광복 초기 북한 정치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한국전쟁을 끝으로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Posted by 홍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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