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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710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15일째 되던 날. 김무정은 한국전쟁 동부전선 공격을 담당하는 제2군단 군단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2군단장은 김광협 중장(1915~1970)이었다. 김광협은 중국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정치위원 출신의 이른바 연안파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춘천을 거쳐 수원에서 서부전선 공격을 담당하는 제1군단과 합류해야 했지만 동부전선 공격이 신통찮아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이때 인민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 12시단장 최춘국 소장이 모두 물러났다

김무정은 전형적인 중국 인민해방군 전술인 돌파, 우회, 포위, 퇴로 차단(전선에서 적의 약점을 파고 들어가 포위한 위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하면서 소백산까지 나갔다. 19507월 말에는 김천, 상주, 예천, 안동, 영덕을 잇는 선까지 진출했다. 이어 낙동강 도하를 준비했다. 당시 국군과 미군은 부산 방어망을 구축했다. 미국 본토에서 증원 부대가 잇따라 도착했다. 이를 본 김일성은 수안보의 인민군 전선 사령부를 찾았다. 그 곳에서 김일성은 전투 명령을 하달했다. 광복 5년 기념일인 815일 이전에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 적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지마라. 낙동강을 건너 부산을 점령하라

하지만 김무정은 그동안 한 달 가까이 전투를 치른 경험으로 미뤄볼 때 인민군과 미군 장비 격차가 너무 크다는 점을 직감했다. 그래서 이른바 8월 공세가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배수전을 펼치라는 지상명령이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그를 인민군 동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예하 6개 사단을 지휘해 8월 공세의 주공격 임무를 맡긴 것이다. 그는 8월 공세를 위해 김천 북쪽에서 영덕으로 전개해 대구, 영천, 포항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이랬다. 15사단은 선산 부근에서 낙동강을 건너 유학산을 거쳐 대구를 공격한다. 13사단은 낙동리 부근에서 강을 건너 다부동을 거쳐 대구를 공격한다. 1사단은 신속히 군위를 점령한다. 그리고 제13사단 좌익에서 함께 대구를 공격한다. 8사단은 의성에 있는 적을 격파한 뒤 영천에 도착해 경주나 대구 공격을 준비한다. 12사단은 태백산맥을 거쳐 포항에 도착해 연일이나 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공격한다. 5사단은 영덕을 탈취한 뒤 포항에 이르러 제12사단과 함께 부산 공격을 준비한다. 김무정은 제766 유격부대에게 안강리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전투는 195085일부터 824일까지 이어졌다. 인민군은 영덕, 군위를 점령했고 왜관을 차지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쏜 포탄이 대구시내에 떨어지기도 했다. 12사단이 가장 성공적이었다. 국군 2사단 1만명 병력을 포항에서 포위했다. 그러나 이들 국군 병력이 바다를 통해 탈출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인민군은 일부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미군 전투기 공습이 심해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동부전선 인민군은 1950812일 이후 쌀 한 톨도 보급을 받지 못했다. 산이 겹겹이 있어 현지 보급품 조달에도 실패했다. 제대로 전투를 벌일 여력이 없었다



그가 그토록 믿었던 제766 유격부대는 청도 터널을 파괴해 국군 퇴로를 끊으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 유격부대장 오진우는 대원들을 병력을 분산 침투시키는 유격전을 펴서는 국군 경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규전으로 국군과 맞붙었다가 안강 회랑 전투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김무정은 화가 나 유격부대를 해체하고 인민군 12사단에 합쳐버렸다. 유엔군이 우세한 화력과 병력을 투입해 끊임없이 반격을 가해오자 인민군은 낙동강 동쪽 기슭으로 후퇴해야 했다



김무정은 8월 공세가 유엔군 반격으로 여의치 않자 다시 9월 공세를 준비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쟁의 무게추가 유엔군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다시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이번에도 그가 주공격을 맡았다. 그의 계획은 이랬다. 3공격집단군(1사단, 3사단, 13사단, 105기갑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 국군 제1사단 방어선을 돌파해 대구를 점령한다. 4공격집단군(8사단, 15사단, 17 기갑여단)은 국군 제6사단, 8사단 방어선을 돌파해 하양과 영천을 점령한다. 그리고 대구나 경주로 돌진한다. 5 공격집단군(5사단, 12사단)은 국군 수도사단, 3사단 방어선을 돌파한다. 포항과 연일 공항을 점령한다. 그리고 부산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195092일 밤, 그가 지휘하던 병력은 대규모 야간공격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공격이 아주 순조로웠다. 특히 제12사단의 전과가 두드러졌다. 국군 수도사단과 제5사단을 연속해서 궤멸시켰다. 유엔군 동부전선에 12 킬로미터 돌파구를 마련했다. 195095, 미국 제1 기병사단, 국군 제3사단이 잇따라 패퇴하면서 포항을 점령했다. 98일에는 영천도 점령했다. 미 제8군 사령부와 국군 사령부는 모두 대구에서 부산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서부전선 인민군이 미군의 저항에 막혀 돌파에 실패하면서 모든 전선의 압력이 동부전선으로 몰려들었다. 김무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반격할 것인가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1950915,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결행했다. 남쪽 전선의 인민군에게는 대재앙이 닥친 것이다. 인민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격전의 명수답게 철수 명령을 받자마자 각 사단의 철수 노선을 정리한 다음에는 모든 무선연락을 끊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미군도 그렇지만 평양도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몰랐다. 안동에 있던 제2군단 사령부는 큰 어려움 없이 원주를 거쳐 38선 이북 김화로 돌아갔다. 13사단만 해체될 정도 타격을 입은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 그가 이끈 부대는 순조롭게 북쪽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핵심 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동은 결과적으로는 성공이었지만 평양 당국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오랫동안 연락두절로 속을 앓았기 때문이었다. 소련 군사 고문도 그의 개인주의 경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Posted by 홍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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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왈왈왈 2016.08.02 1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왔었군요. 얼마나 고무됐을까?ㅋㅋ
    "동무들! 남조선 해방이 코앞에 이서. 날래 진격하라우."
    두 달여가 지나자 한 노인이 덩달아 들뜨는데.
    "크.. 압~록강~~ 물맛이 시원~~ 하군. 이보게 하군! 시야시 된 건~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