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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해방군 포병 창시자는 조선 사람인 김무정(金武亭, 1904~1951)이었다. 190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집은 가난했지만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공장에 다니면서 학교를 다녔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학업과 생활을 유지했다. 1919년 15세 때 3.1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서울 중앙고보에 들어갔다. 1923년 중앙고보를 퇴학했다. 그해 3월,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거쳐 베이징에 갔다. 그는 문화대학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웠다. 



1924년 선양(당시 이름은 봉천)에 있던 중국 4대 군관(사관)학교의 하나인 동북강무당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포병을 전공으로 배웠다. 그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북양 군벌의 포병 상위(대위와 중위 중간 계급)로 임명됐다.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22세, 포병 중교(중령)로 승진했다. 


그는 1925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당원이 1천명에 못 미치는 자그만 정당이었다. 그는 군벌 군적을 포기하고 제1차 국내혁명(1924년부터 27년까지 국민당, 공산당이 함께 군벌을 타도한 혁명)에 참가했다. 1927년 국민당의 장제스(장개석)가 한때 손을 잡았던 공산당을 탄압하면서 그도 체포 위기에 빠졌다. 그는 하는수없이 지하로 들어가 활동했다. 그러다가 우한에서 붙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당시 현지 법관 중 지인이 있어 다행히 풀려났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있던 상하이로 도망갔다. 그는 상하이에서 공산당 일을 다시 시작했다. 




1929년 상하이 노동자 폭동을 조직했다. 그는 외국인이지만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나 폭동을 전체적으로 지휘하는 총지휘라는 자리를 맡았다.  폭동이 실패로 끝난 뒤 그는 영국 경찰에 체포돼 그해 10월10일 징역 2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제2차 국내혁명(토지혁명, 1927년부터 37년까지 지주의 땅을 뺏어 농민들에게 나눠줌)에 참가했다. 그리고 당시 홍 3군단을 지휘하던 펑더화이(팽덕회) 휘하로 들어갔다. 




1930년 7월31일 홍 3군단은 산포(산악 지대에서 운용하는 소형 대포) 중대를 만들었다. 후난성 웨저우를 공격하면서 국민당 군대로부터 야포 4문와 산포 2문을 노획해 그것으로 중대를 만든 것이다. 그는 홍3군단 산포 중대장을 맡았다. 1931년 5월, 홍군은 중앙군사위 포병단을 만들었다. 초대 단장이 일을 잘못하는 바람에 그가 그해 6월 포병단 2대 단장이 되었다. 홍군 시기 그는 뛰어난 전공 덕분에 승진이 아주 빨랐다. 결국 홍군의 핵심 지휘부인 중국 공산당 군사위원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정치적 배경이 없는 외국인으로서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1930년 12월부터 1934년 10월까지 장제스는 홍군에 대해 5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소탕전을 벌였다. 장시(강서)성 루이진(서금)에 중국 공산당이 세웠던 소비에트 지구를 장제스 군대가 점령했다. 





중국 공산당은 장시성 루이진을 떠나 안전 지대를 찾으려 이동하기로 했다. 이것이 유명한 2만5천리 장정이다. 1934년 10월14일 장시성 위두를 떠나 1836년 12월12일 산시(섬서)성 옌안(연안)에 도착하는,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는 장정 시기 중앙군사위 직속 포병부대 지휘관으로 구조대 역할을 맡았다. 공격이든 후방 퇴로를 끊든 화력지원 임무가 있는 곳이면 그가 진두지휘했다. 그는 중앙군사위 종대 제3야전 제대 사령관을 맡아 포병대대, 공병대대, 수송 제1대대와 부속 야전병원을 함께 지휘했다. 




장정 대열이 쓰촨 지방으로 갔을 때였다. 당시 무전 암호를 바꾼 상태에서 홍 3군단은 홍 1군단과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위기의 순간에 군단장 펑더화이는 새로운 암호집을 그에게 주고 홍1군단에게 전달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 그는 나침반 하나만 들고 초원 지방을 누비면서 마침내 홍 1군단에게 암호집을 전해줄 수 있었다.



홍군은 장정 기간 내내 굶주림 속에서 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추격하는 장제스의 국민당 군과 500차례가 넘는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야 했다. 홍군이 장정을 떠났을 때 조선인은 30명이 넘었다. 하지만 도중에 대부분 목숨을 잃고 장정의 마지막 목표였던 산시(섬서)성에 도착했을 때 생존한 사람은 김무정과 양림 2사람 뿐이었다. 그나마 양림은 1936년 2월 황허 도하작전에서 돌격대장으로 나섰다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양림의 죽음이 결국 그의 목숨을 살렸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양림이 전사한 뒤 군단장 펑더화이가 당위원회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외국인 혁명가들이 중국 혁명을 위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들을 계속해서 중국에서 죽게 만든다면 훗날 그 사람들의 조국 혁명 사업은 누가 맡을 것인가, 이미 전사한 동지들이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외국 동지의 목숨을 더이상 버리게 해서는 안된다. 펑더화이 호소가 먹혀들어 중앙군사위는 그에게 전장을 떠나 학습의 기회를 주었다. 당시 그는 심한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전장에 계속 있었더라면 전사가 아니라 병으로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는 펑더화이를 생명의 은인으로 삼았다. 





1936년 그는 홍군대학에 들어가 전략학을 공부했다. 홍군대학을 마친 뒤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을 맡았다. 1937년 말, 그는 팔로군 총사령부 포병처 주임으로 팔로군 포병부대 창설을 주도했다. 1938년 초에는 팔로군 총사령부 포병단장을 맡았다. 홍군에서 그는 포병에 관한한 최고 권위자자 된 것이다. 




그는 이후 중국에 온 조선 청년들의 무장역량인 조선의용군을 조직하는 데 힘을 쏟았다. 토지혁명 시기(1927년부터 37년까지) 살아남은  10여명의 조선 혁명가를 주축으로 옌안에 온 조선 청년,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조선 청년, 만주에서 활동했거나 모스크바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옌안에 온 청년을 모두 한 군데로 모아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1939년 이들을 팔로군 전방사령부가 있던 산시(산서)성 진둥난으로 데리고 갔다. 이들은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투에 참가했다. 





1941년 1월10일, 조선독립동맹 전신인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창설했다. 그가 회장을 맡았다. 그해 6월, 국민당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에서 활동하던 조선 의용대 일부가 팔로군 쪽으로 넘어오자 이들을 모아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편성했다, 그해 8월 팔로군 총사령부에서 조선의용대 간부 훈련반을 만들어 그가 교장을 맡았다. 이곳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는 군사 간부를 전문적으로 양성했다. 이어 팔로군 전방사령부에 조선청년간부학교와  조선무장선전대를 만들었다. 그해 10월26일 옌안에서 열린 동방 각민족 반파시스트 대표대회에서 그의 초상화는 외국 항일 지도자로 마오쩌둥 주석과 함께 걸렸다. 



그와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자 저명한 독립운동 지도자 김두봉도 충칭을 떠나 합류했다. 국내에 있던 민족 지도자 여운형도 연락원 김명시(훗날 무정의 연인이 됨)를 옌안으로 보내 그와 일본 패망 이후 건국 문제를 논의했다. 



그의 이름은 모스크바에도 알려졌다. 1941년 7월 소련 최고 지도자 스탈린은 전용기를 옌안에 보내 그를 소련으로 데려가려 했다. 명분은 그의 뛰어난 야포 기술을 소련에서도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전 문제를 우려한 마오쩌둥이 그를 소련에 보내지 않았다. 성사가 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이 전용기를 보냈다는 사실은 그의 성가를 한껏 높였다.  


1942년 7월11일,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정식 출범했다. 그는 동맹 중앙집행위원과 조선의용군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조선의용군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언젠가 이들을 이끌고 조국을 광복시키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1944년 8월 일본 제국주의 패색이 완연해졌다. 그는 소련이 곧 한반도를 장악할 것으로 예견했다. 그러면서 황허 작전에서 전사한 동료 양림의 부재를 애석해했다. 양림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의지력과 지모가 뛰어나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소련과의 관계를 잘 처리했을 것으로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Posted by 홍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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