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주도했던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동란이었다. 1976년 10월 끝날 때까지 10년 동안 대학입시가 없었다. 대다수 공장은 가동을 하지 못했다. 경제적 피해는 5000억 위안으로, 건국 이후 30년 동안 중국 고정자산 총액을 뛰어넘었다. 문혁 10년으로 중국 경제 자산을 모두 소진시킨 셈이다. 인명피해도 엄청났다. 1억 명 이상이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류사오치(劉少奇) 국가주석을 비롯해 수많은 당간부와 지식인들이 반당분자로 몰려 홍위병들에게 수모를 당하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자살도 숱하게 일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참전했던 펑더화이(彭德懷) 원수, 허룽(賀龍) 원수를 비롯해 장군도 모두 42명이 죽었다.

 

 

문혁은 왜 일어났는가.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 주석의 잘못된 판단을 장칭(江靑, 마오쩌둥 부인, 4인방)과 린뱌오(林彪, 문혁을 계기로 2인자로 부상.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시도하다 몽골로 도망치던 도중 비행기 추락으로 숨짐)와 같은 일부 인사들이 악용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마디로 마오쩌둥의 권력욕 때문이었다. 1958년 대약진 운동 실패로 2선으로 물러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에게 넘겨준 권력을 되찾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문혁은 1966년 5월16일 정치국 확대회의를 통과한 이른바 5.16통지로부터 시작했다. 통지문은 당, 정부, 군에 숨어있는 반혁명 수정주의자를 찾아내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마오 명령에 따라 수정주의자를 찾아내는 데 앞장을 선 이가 바로 홍위병이었다. 이들은 초중고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였다.

 

 

학교가 문을 닫자 학생들이 각자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홍위병 조직을 결성해 당 간부들에 대한 비판 대회와 함께 가택 수색, 책 불태우기에 앞장섰다. 피아노는 가져다가 땔감으로 썼다. 홍위병이 앞장섰던 것이 바로 4구 타파(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였다. 도로, 가게, 학교, 공장, 공원 이름까지 봉건주의 분위기가 풍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없애고 새로운 이름을 달았다. 수백년 전통의 명품 가게에 달린 간판은 모두 땔감으로 사라졌다. 홍위병이 파괴한 문화 유적은 1930년대 항일전쟁, 1940년대 국공내전을 합쳤을 때보다 훨씬 많았다.

 

 

홍위병이라는 이름은 1966년 5월29일, 홍위병의 근거지로 유명했던 칭화대 부속중 대자보에 처음 나타났다. 이후 다른 학생들이 홍위병이라는 이름을 따라 쓰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그해 8월18일부터 모두 8차례에 걸쳐 톈안문 광장 성루에 올라서서 중국 전역에서 온 홍위병 1300만명을 격려했다. 하지만 권력을 잡고 난 홍위병은 계파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갓 출범한 혁명위원회에서 자리를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로 대규모 무력충돌까지 벌였다. 이미 류샤오치를 제거한 마오쩌둥으로서는 홍위병들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1968년은 66년과 67년, 68년 3년에 걸쳐 홍위병들이 초중고교를 졸업했지만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상급 학교에 진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들의 처리 문제도 심각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이른바 하방(下放, 밑으로 내려보낸다는 뜻으로 농촌이나 공장에 사람을 보내는 걸 말함)이다. 1955년부터 시작했던 상산하향(上山下鄕, 산에 오르고 시골로 내려가다는 뜻. 처음에는 황무지 개간에 동원)운동을 확대개편해 홍위병들을 시골로 보내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혁명사상을 배우라고 주문한 것이다. 1968년부터 모두 1300만명의 학생(이들을 지식청년이라고 부른다)들이 시골로 갔다.

 

 

도시 학생들이 시골에 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농촌의 인민공사 책임자에게 뇌물을 주고 빠져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문혁은 1976년 10월6일 4인방(王洪文, 張春橋, 江靑, 姚文元)이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중국 사람들은 문혁 10년을 거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너무나 큰 희생과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혁개방정책의 후유증으로 빈부격차, 고위 당간부 비리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차라리 문혁 때가 좋았다는 향수가 생겨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집권 3년만에 권력을 장악하면서 문혁이 남겨준 교훈인 개인숭배를 막기 위한 최고 지도자 종신제 폐지, 집단지도체제는 흔들리고 있다. SNS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통일된 사상을 주문하는 것도 심상찮은 조짐이다. 제2의 문혁이 일어날 것인가. 그것은 중국 지도부가 선택하기에 달렸다.  


             

Posted by 홍인표

댓글을 달아 주세요